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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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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군 해산은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과 비밀각서에 따라 7월 31일 순종이 군대 해산 조칙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조칙은 비용 절감, 군사 제도 쇄신, 징병법 발포를 명분으로 군대 해산을 결정하고, 장병들에게 은금을 지급하며 폭동 진압을 통감에게 의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은 이완용을 통해 군대 해산을 한국 황실이 자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하사금을 지급했다. 8월 1일 서울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과 남대문 전투가 발생했으나 진압되었다. 대한제국 군 병력 규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위대는 4000명 규모였으며, 이후 친위부가 설립되었으나 유명무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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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해산
배경
시기1907년 8월 1일
원인정미7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의 군사력 약화 목적
과정
해산 명령대한제국 군대 해산 명령 발표
저항남대문 전투 발발
시위대와 진위대의 저항
정미의병 봉기
결과
군사적 결과대한제국군 해체
대한제국의 군사력 상실
정치적 결과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지배 강화
사회적 결과의병 운동 확산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관련 인물
주요 인물고종
순종
이완용
관련 사건
주요 사건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정미7조약
참고 자료
관련 문서대한제국군
정미7조약
정미의병
남대문 전투
기타
영향항일의병 운동의 기폭제
일제강점기 시작의 주요 원인

2. 경과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과 비밀각서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하세가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은 대한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였다. 7월 31일 순종은 군대해산 조칙을 내렸다.[1]

8월 1일 한양에서부터 군대 해산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7월 31일 밤, 미리 군대해산 칙서를 작성하고 이완용을 시켜 '조회문'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하여,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2]

같은 날 오전 11시, 동대문 훈련원에서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의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하고 병사와 장교들의 계급장을 떼었다. 일본군 헌병은 중무장한 채 병사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 해산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자, 분노한 시위대 2개 대대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나(남대문 전투) 결국 진압되었다.[1]

일본은 군대 해산과 함께 하사금을 지급했는데, 하사에게는 80JPY,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JPY,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JPY이었다.[3]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 대한제국군 모습

2. 1. 한일신협약과 군대해산 조칙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었을 때 첨부된 비밀각서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하세가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은 대한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였다. 그 후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詔令|조령중국어을 내리기를, "짐(朕)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 제도를 쇄신할 생각 아래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하였다.

또 詔令|조령중국어을 내리기를,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 하였다.[1]

이어서 8월 1일 한양에서부터 군대해산을 결행하였다. 일본은 7월 31일 밤, 미리 군대해산의 칙서를 작성해 놓고는 이완용을 시켜 다음과 같은 '조회문'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했다.[2]

병제개혁을 위해서 선포할 조칙을 받들어 군대를 해산할 때에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아울러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하는 자가 있다면 진압할 것을 각하에게 의뢰하고자 하는 대한국 황제폐하의 칙지를 삼가 받은 바 있으므로 이와 같이 각하에게 조회하는 바이오니 받아들이시기를 바라나이다.|병제개혁을 위해서 선포할 조칙을 받들어 군대를 해산할 때에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아울러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하는 자가 있다면 진압할 것을 각하에게 의뢰하고자 하는 대한국 황제폐하의 칙지를 삼가 받은 바 있으므로 이와 같이 각하에게 조회하는 바이오니 받아들이시기를 바라나이다.중국어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이라 할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허수아비 내각 수반인 이완용의 '조회문'을 통해 추진하는 수법을 썼다.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꾸며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른바 황제의 하사금이라는 것도 나누어 주었다. 하사에게는 80JPY,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JPY,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JPY씩이 지불되었다.[3]

2. 2. 이완용 내각의 역할

일본은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 체결 시 첨부된 비밀각서에 의거, 대한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고 군대해산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허수아비 내각 수반인 이완용의 '조회문'을 통해 군대해산을 추진하는 수법을 썼다.[3] 이는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꾸며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한 의도였다.

8월 1일, 일본은 이완용을 시켜 다음과 같은 '조회문'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했다.

일본은 군대 해산과 함께 이른바 황제의 하사금이라는 것도 나누어 주었는데, 하사에게는 80KRW,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KRW,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KRW씩이 지불되었다.[3]

2. 3. 군대해산 실행과 저항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 체결과 함께 첨부된 비밀각서에 따라, 8월 1일 한양에서부터 군대 해산이 시작되었다.[1] 일본은 7월 31일 밤, 군대 해산 칙서를 미리 작성해 놓고 이완용을 시켜 '조회문'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하여,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2]

8월 1일 오전 11시, 동대문 훈련원에서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의 군대 해산 조칙을 낭독하고, 병사와 장교들의 계급장을 떼었다. 이때 일본군 헌병이 중무장한 채 병사들을 포위하고 있었다.[1] 군대 해산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자, 분노한 시위대 2개 대대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나(남대문 전투) 결국 진압되었다.[1]

일본은 군대 해산과 함께 하사금을 지급했는데, 하사에게는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원,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원이었다.[3]

2. 4. 해산 이후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 체결과 함께 첨부된 비밀각서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하세가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은 대한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였다. 이후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1]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8월 1일 한양에서부터 군대해산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은 7월 31일 밤 군대해산 칙서를 미리 작성해 놓고 이완용을 시켜 '조회문'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했다.[2] 군대 해산 시 하사에게는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원,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원의 하사금을 지급하였다.[3]

8월 1일 오전 11시, 동대문 훈련원에서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의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하고, 병사와 장교들의 계급장을 떼었다. 일본군 헌병이 중무장한 채 병사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 해산은 8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분노한 시위대 2개 대대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나(남대문 전투) 결국 진압되었다.

이후 1909년 친위부를 설립하였고, 초대 대신은 군무대신이었던 이병무가 되었다. 이병무는 시종무관장으로 격하되어 유명무실한 친위부를 관장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순종 실록 내용 http://sillok.histor[...]
[2] 간행물 통감부문서 (출판사 정보 없음) 1907-08-01
[3]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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